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홈 레지오 - 아이들의 백 가지 언어: 아흔아홉 가지를 훔치지 않는 엄마가 된다는 것

by kinderMom 2026. 4. 5.

 

찰흙으로 물리적 대화를 하는 아이를 지켜보는 엄마의 모습

 

레지오 에밀리아 교육법을 공부하다 보면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문장이 있습니다. 바로 이 교육의 창시자인 로리스 말라구치(Loris Malaguzzi)가 남긴 시, '아이들의 백 가지 언어'입니다.

사실 저는 이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단순히 "아이들은 표현력이 풍부하다"는 비유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홈 레지오 환경을 어떻게 꾸밀지, 아이에게 어떤 성장의 토양을 만들어줄지 진지하게 고민하며 공부해보니, 이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아이를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이더라고요. 오늘은 제가 이 개념을 막연히가 아니라 확실히 알아가며 느낀 점 과 '백 가지 언어'에 대한 상상을 나눠보려 합니다.

🏛️ "백 가지가 있지만, 아흔아홉 가지를 훔쳐간다"

말라구치의 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아이에게는 백 가지 언어가 있다. (중략) 그러나 사람들은 그중 아흔아홉 가지를 훔쳐간다. 학교와 문화는 머리와 몸을 분리하고, 아이에게 손 없이 생각하고, 머리 없이 일하라고 말한다."

공부하면서 이 대목에서 마음이 참 무거웠습니다. 우리는 아이가 말을 시작하면 "이제 의사소통이 되네!"라며 기뻐하고, 글자를 깨치면 "이제 공부할 준비가 됐구나"라고 안도하죠. 하지만 레지오의 관점에서 보면, 말과 글이라는 '지배적인 언어'에 갇히는 순간 아이가 가진 나머지 아흔아홉 가지의 표현 수단—찰흙을 빚는 손길, 그림자의 움직임을 쫓는 눈빛, 블록의 균형을 맞추는 섬세한 근육의 움직임 등—은 서서히 빛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동안 아이에게 '입'으로만 말하라고 강요하며, 아이의 '손'과 '몸'이 하는 위대한 대화들을 놓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 질문이 제가 아틀리에를 고민하고 기록을 공부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 매체(Medium)는 아이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단어'입니다

레지오 에밀리아에서는 다양한 재료를 단순히 '미술 도구'라고 부르지 않고 '매체(Medium)'라고 부릅니다. 아이에게는 이 매체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문법을 가진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 찰흙이라는 언어: 찰흙은 '부피'와 '무게'로 말하는 언어입니다. 아이는 손바닥으로 흙을 누르며 저항감을 느끼고, 그 안에서 힘의 조절과 형태의 변화를 배웁니다. 이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물리적인 대화죠.
  • 빛과 그림자라는 언어: 라이트 테이블 위에 투명한 도형을 올릴 때 나타나는 변화는 '투명함'과 '색의 겹침'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아이의 언어로 번역해줍니다.
  • 와이어와 실이라는 언어: 선(Line)이 공간 속에서 어떻게 입체가 되는지를 아이는 손가락 끝으로 이해합니다.

공부해보니 홈 레지오 환경을 꾸민다는 건, 단순히 예쁜 가구를 들이는 게 아니라 아이가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다양한 단어(재료)'들을 정갈하게 배치해주는 작업이었습니다. 아이가 "오늘은 나뭇가지 언어로 내 마음을 표현해볼래"라고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는 것이죠.


📝 기록(Documentation)이 '백 가지 언어'를 완성하는 이유

 

2026.04.04 - [분류 전체보기] - 홈 레지오 - "잘했다"는 칭찬보다 힘이 센 '기록'의 마법

 

홈 레지오 - "잘했다"는 칭찬보다 힘이 센 '기록'의 마법

요즘 레지오 에밀리아 교육을 공부하며 가장 머리를 '딩-' 하고 울렸던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도큐멘테이션(Documentation)', 즉 기록입니다.사실 저는 아직 아이와 본격적인 레지오 활동을 시

honeyjupjup.com

 

지난 포스팅에서 다뤘던 '기록'의 중요성도 결국 이 백 가지 언어와 맞닿아 있습니다. 아이가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하는 아흔아홉 가지의 언어들을 엄마가 알아채고 기록해줄 때, 비로소 그 언어들은 생명력을 얻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아무 말 없이 조약돌을 일렬로 길게 늘어놓고 있다면?

  • 예전의 나: "와, 길게 줄 세웠네? 멋지다!" (말이라는 언어로 결론지음)
  • 공부하는 나: (아이가 돌 사이의 간격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손길을 관찰하며 기록) "너는 이 돌들이 서로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었구나. 이건 꼭 비버들이 길을 가는 것 같네?"

엄마가 아이의 비언어적인 표현을 진지하게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겨주는 순간, 아이의 사소한 몸짓은 '의미 있는 문장'이 됩니다. 기록은 아이의 아흔아홉 가지 언어를 통역해주는 엄마만의 '번역기'인 셈입니다.


 

홈 레지오 환경에 대한 고민을 하며 제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엄마의 조급함'입니다. "이 재료를 줬으니 이런 결과물이 나와야 해"라는 기대, 혹은 "말이나 글로 정답을 말해봐"라는 압박이 아이의 언어를 훔쳐가는 도둑이 될 수 있으니까요.

레지오를 공부하며 제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훨씬 넓어졌다는 점입니다. 이제 거실 바닥에 흩어진 나뭇잎 조각이나 삐뚤삐뚤하게 붙여진 테이프 자국들이 단순한 '지저분함'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아이가 오늘 하루 동안 세상을 향해 치열하게 내뱉은 '시(詩)'이자 '철학적인 질문'들입니다.

아직은 모든 것이 알아가는 단계지만, 우리 아이가 가진 백 가지 언어가 어느 하나 사그라지지 않고 마음껏 발산될 수 있는 그런 환경을 선물해주고 싶습니다. 굳이 레지오라는 틀에 갇히지 않더라도, 아이의 모든 몸짓을 하나의 '언어'로 존중해주는 태도만은 끝까지 가져가고 싶네요.

아이의 언어를 이해하는 과정이라는게 쉽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우리 아이가 손끝으로, 혹은 눈빛으로 건넨 '말'을 발견하셨나요? 아이의 아흔아홉 가지 언어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 그것이 홈 레지오의 진정한 시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Inside life